Monday, February 28, 2011

파시여, 다시 한 번 - 바다에 선 어시장

파시여, 다시 한 번

항구는 이미 수백 척의 배로 가득 찼다. 그런데도 내항 좁은 수로를 따라 통통배가 연이어 들어온다. 고기를 엄청나게 잡아 설까, 배마다 중갑판이 미어터질 듯 뺑뺑하다. 오색 만선기(滿船旗)아래 검게 그을린 어부들은 신이 났다. 얼싸안고 춤을 춘다. 징과 꽹과리를 치며 목청껏 노래를 불러댄다. "칠산 바다에 뛰노는 조기/ 우리네 그물로 다 들어왔네." 뒤를 바짝 따르는 운반선 선원들이 후렴을 받아 화답한다. "지화자 좋다~ 어 헤요, 에 헤요!"



파시(波市), 바다에 선 어시장

흑산어장 초만원사례
1966. 5. 3 [동아일보] 1면
파시(波市)다. 풍요다. 모든 게 넘친다. 섬은 생선과 어부와 술, 그리고 아낙으로 가득 찼다. 뿐인가. 생선 쪼가리를 찾아 날아든 갈매기 떼마저 부두 하늘을 메웠다. 위판장과 주변엔 파리도 끓는다. 얼굴이건 생선에건 날것이 앉으면 귀찮아 손을 휘휘 젓지만 사람들 입가엔 웃음이 함박처럼 걸렸다. 조기가 벌써 몇 동(1동은 1천 마리)이 풀렸는가. 그 돈이 얼마인가. 한잔 걸친 기분은 왜 이다지 좋은가. 아아, 세상살이가 제발 오늘만 같았으면, 넘치고 흥청대 웃음꽃 가득한 파시가 오늘처럼만 열린다면….

파시는 바다에 선 어시장이다. 그물 가득가득 잡혀 올라오는 고기를 처분하러 뭍에 나갈 시간조차 아까운 배들이 어장에서 바로 운반선에 생물을 넘겼다. 그 바다가 파시다. 검푸른 파도에 목숨을 걸지만 만선만 되면 목숨 값을 두둑이 챙기는 사나이들. 한없이 거칠고, 뭍에의 그리움에 가슴이 단 사나이들이 평생을 품에 안고 사는 시장이 또 파시다. 그 바다 장터가 가까운 뭍과 섬의 항구로 옮겨지자 술과 여인이 숙명처럼, 철새처럼 따라붙었다. 그렇다. 파시 대박은 혼자 오지 않는다. 나눠가져야 진정한 파시다.



풍요의 대명사 '서해바다 파시'

1970년대 중반까지 서해바다 파시는 풍요의 대명사였다. 90년대 부동산 돈벼락 때 "개도 포니를 타고 다닌다."는 말이 유행했듯 60-70년대 서해 파시에선 "새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았다. 전남 흑산도 파시, 전북 위도 파시, 경기 연평도 파시는 조기어장의 3대 파시로 유명했다. 동 남해안의 삼치 멸치 고등어 오징어 파시도 있었지만 흥청거리고 북적대 한몫 두둑이 챙겨나가기는 조기 파시와 비길 바가 아니었다.

동지나해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는 봄에 황해를 거슬러 산란 길에 오른다. 3월 흑산도, 4월 칠산어장(전남 영광앞바다 위도근해), 5월 충남 격렬 비열도를 거쳐 연평도와 황해도 장산곶에 이르러 알을 낳는다. 그때의 바다는 목만 잘 잡으면 그야말로 '고기 반, 물 반'이다. 진정한 풍어, 진짜 대박은 그때 단 한 번 그물질로 만선이 되는 것이었다. 유자망(바다 속에 커튼처럼 내려 그물코에 물고기가 걸려들게 하는 그물)을 딱 한번 내렸다 올릴 뿐인데도 고기가 가득해 미처 떼지도 못하고 그물째 입항해야 진짜 만선풍어였다.
드높은 만선
1973. 4. 18 [경향신문] 5면

그래야 출어경비도 별로 안 들었고 첫물 조기라 값을 꽤 받았다. '해방 후 최대 풍어'라던 1966년 흑산 파시에는 첫 그물에 조기 80~120동을 잡은 배들이 오색 만선기를 펄럭이고 꽹과리를 치며 예리 항으로 들어오곤 했다. "황금에 덮인 흑산도"라는 신문제목이 나올 정도로 대풍을 맞은 그해 흑산 어장에는 전국에서 당도한 2천여 척의 어선이 바다에 잔뜩 깔렸다. 마치 옥쟁반에 콩을 뿌린 듯 드넓은 바다에 점점이 깔린 배들마다 그득그득 조기를 끌어올렸다. 흑산 어업조합은 그해 1월부터 4개월간 조기어획량이 4백58만kg, 1천5백28만 마리, 3억4천5백만 원어치라고 밝혔다.



만선의 기쁨이 가득한 어시장, 어둠이 깔리면..

서해의 초하 '바다의 집시 아가씨'
1962. 5. 28 [동아일보] 3면
이러니 밤의 흑산도는 그야말로 '니나노 세상'이었다. 선창가에 기다랗게 늘어선 목조 2층 건물마다 어부들이 들어차 동이 틀 때까지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골목길에선 팔도 사투리가 다 쏟아졌고 거친 사내들의 주먹질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쇠 젓가락으로 주전자 두드리는 소리에 간드러진 웃음이 잦아들고 대박을 맞은 뱃사람들은 '마도로스 인심'을 팍팍 썼다. 다음날 아침 헛돈을 뿌린 게 아까워 쓰린 속을 부여안고 해장술을 켰지만, "까짓 것 한 항차만 더 나가 한 번 더 대박을 터뜨리면" 금세 만회가 될 것이었다.

파시는 밀물 썰물처럼 옮겨 다녔다. 어떤 어장에서 고기 대박을 터트리느냐에 따라 파시는 이동했다. 선착장에 갈매기와 여인네가 얼마나 보이느냐로 파시의 규모를 알 수 있었다. 76년 흑산도 예리 항구의 상주인구는 3백12가구 1천7백여 명이었으나 5월 파시 때는 어부와 철새 아가씨 등 3천여 명이 늘어난 5천명이 복작거렸다. '명동보다' 더 붐비고 물가도 비싸다는 이곳 선창가에는 밤새 여는 다방 7군데, '관' '장'자 돌림으로 된 술집과 음식점 여관이 80개소, 이발소만도 네 군데나 됐다.

물가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74년 흑산 파시를 취재한 신문에 따르면 생선찌개 한 냄비는 무조건 1500원, 맥주 안주로 나오는 땅콩 한줌에 500원이었다. 개다리소반에 술 한상을 보면 못 잡아도 1만원은 나왔다. 술값만 비싼 게 아니었다. 80원이던 환타 한 병이 150원, 70원짜리 비누 한 갑은 130원이었다. 또 30원이던 하이타이가 60원, 30원이던 연탄 한 장이 90원이나 해 거의 모든 물가가 육지의 최소 2배, 많게는 4-5배까지 받았다. 오죽하면 억울함을 못 이겨 담벼락에 "손님은 곰이다"는 낙서를 대문짝만하게 써놓기까지 했겠는가.

아이러니한 것은 날씨가 좋아 어군을 제대로 쫓아야 풍어를 바라보지만 파시 장사꾼, 특히 여인네들은 오히려 날이 궂기를 기원했다는 점이다. 산꼭대기에 올라 고기잡이 선단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여인들은 "바람아, 강풍아 석 달 열흘만 불어라, 우리 님 보고 싶어…"를 소리 내 읊조리기도 했다. 기상상황이 안 좋으면 배는 조업을 중단하고 가까운 항구로 피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라도 님을 만나고 싶다는 염원이 거기 담겼다. 파시에서 맺어진 한두 푼 풋사랑일 망정 그리움을 잉태하는 건 여느 사랑과 같았다.
흑산도의 이모저모 '파시엔 낙조만이'
1974. 5. 9 [동아일보] 7면



70년대부터 내리막길을 걷게된 파시

「파시」가 사라져간다
1974. 5. 7 [동아일보] 7면
그러나 파시는 60년대 말을 절정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한일국교정상화와 어업협정 체결 이후 반짝했던 어획고는 장비 기술면에서 일본의 상대가 되지 않는 한국의 완패로 빠르게 귀착돼갔다. 게다가 69년에는 북한의 무장간첩선 침투 루트를 막는다며 서해 어로한계선을 남하한 탓에 조기잡이 어황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연평도 주어장과 서남방의 '밧세 어장', 백령도 남방 '서청골 어장'에서의 조업을 사실상 금지한 조치로 이때부터 조기 철 최고의 바다시장, 연평파시는 이름만 남긴 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위도 파시도 위기에 처했다. 70년 서해바다의 조류가 바뀌며 조기보다 삼치가 더 많이 잡히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칠산어장 최대의 항구 위도 파장금 항에선 그해부터 삼치파시가 서기 시작했다. 대일 활선어 수출선이 상시 정박해 칠산어장에서 잡힌 삼치를 바로 일본으로 빼냈다. 흥청거리던 조기파시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부두 위판장에 잠깐 스칠 뿐, 바로 일본으로 나가는 삼치 장은 파시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진짜 파시는 말이여, 파장금에서 멀리 칠산 어장까지 배를 건너뛰어 갈 수 있었당게! 어느 배에나 조기가 그득했어! 부안이나 영광에서 밤에 바다를 보면 휘황찬란한 불배들이 섬을 이룬거라, 그게 진짜 파시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시여, 다시 한번! 

74-76년 흑산도에서는 거의 끝물 파시가 열렸다. 어획량이 급감하자 당국이 어로자금을 풀어 어선의 현대화 대형화를 유도했고 덩치가 커진 배들이 남지나해상까지 진출해 고기를 잡아온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79년 언론은 "파시는 옛말이 됐고 조기는 금값"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기 어획이 10년 전의 반의반 정도로 줄었다는 것이다. 가령 69년 인천항에는 참조기 6410톤이 입하됐으나 5년만인 74년 4924톤, 9년째인 78년 1675톤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줄었고 79년엔 겨우 640톤만 입하됐다고 했다. 그나마 참조기는 거의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들이 커지자 섬의 작은 항구에 파시가 서는 일이 없어졌다. 고기잡이 기술과 장비가 늘면서 알밴 조기를 그야말로 '일망타진'하니 연안의 고기가 사라졌다. 게다가 지구온난화 탓인지 수온과 조류조차 들쭉날쭉해 많던 고기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흥청거리고 질펀했던 파시가 섰던 자리는 이제 관광선이나 외지인을 위한 낚싯배 부두로 변했다. 새해 아침이면 한해 조기 고등어 삼치파시가 자주 열려 돈벼락이 떨어지기를 고대했던 섬사람들은 거의 뭍으로 떠났고 이젠 파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조기 흉어에 한숨만 만선
1977 5. 16 [동아일보] 7면

2011년 새아침, 그래도 '넘치고 흥청대 웃음꽃 가득한 파시'가 우리 삶 속에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파시여,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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