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28, 2011

점(占)에 빠지다 - 길흉, 내 손 안에 있소이다

점(占)에 빠지다

#1. 1965년 7월 26일. 창경원(당시명칭. 현재 창경궁) 동물원에서 베트남 산 비단구렁이 한 마리가 행방불명되었다. 길이 2m 70cm, 몸 둘레 직경 10cm인 이 뱀은 파월 비둘기부대 장병들이 잡아 어린이들에게 보여주라며 배편으로 보낸 것. 전쟁터 장병들이 고국을 그리며 보낸 희귀한 뱀을 잃어버렸다는 질책에 창경원 측은 닷새 동안 경내 곳곳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결국 점쟁이에게 물어본 결과 "뱀은 우리 서쪽 땅 속에 있다. 그러나 그곳을 파면 뱀이나 사람이 다친다."는 점괘를 얻었다. 2중 철창에 바닥은 콘크리트인 우리에서 뱀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궁금했지만 점괘를 받은 동물원은 즉각 수색을 중단했다.

"참화의 자리에 안태비는 산신제"
1970. 4. 23 [동아일보] 7면

#2. 1970년 4월22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아파트 입주자 1천5백 명이 와우 산 정상에 올라가 산신제를 올렸다. 2주전 아파트 한 동이 무너져 32명이 숨진 대참사가 와우 산신이 노해 일어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 사고 직후 노인들이 "해마다 신당(神堂)에서 산신제를 지냈는데 작년에 정성이 모자라 산신이 노해 아파트를 무너트린 것"이란 말을 했다. 놀란 주민들은 쌀 3가마를 모아 떡을 찧고 성금으로 돼지(1백80돈)도 사 제사를 지낸 것. 점쟁이에게 물어 22일과 25일이 길일이란 괘를 얻었고 하루라도 빨리 노여움을 풀려고 22일에 서둘러 제를 지냈다. 남녀노소 모두 "같은 화가 제발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빌었으며 참배에만 1시간이 걸렸다.

#3. 1982년 1월. K병원 신경정신과장 이 박사는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한 박사과정 환자의 케이스를 신문에 실었다. 환자는 심심풀이로 신수점을 보았는데 "섣달에 큰 병을 앓겠다."는 점괘를 받았다. 그가 이 박사를 찾아온 것은 '미칠 것 같은 불안감' 때문.

그의 하소연은 이랬다. "아무리 믿지 않으려 해도 안 됩니다. 몸이 이렇게 말라 들어가니 그 점괘가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무척 조심해 아직은 별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가급적 외출도 삼가고 집에서 규칙적 운동도 했는데 섣달그믐이 다가오자 영 초조해 미칠 지경입니다. 꿈도 뒤숭숭하고요." 이 박사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자 환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나도 창피하지만 점괘를 무시할 것도 아닙니다.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도 많아요."라고 항변했다.



점복이 사회문제가 되었던 1960~80년대

전문가가 아니라도 점을 치고 점괘를 받아 행동하는 일은 우리 일상에 너무나 많다. 어린 시절 손바닥에 침을 뱉고 손가락으로 쳐 침이 튄 방향으로 행선지를 잡거나 화투, 윷, 동전 던지기로 사안의 해결책을 모색한 일도 점괘 찾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불확실한 미래에 잘 대처하겠다는 염원이 점을 치는 걸로 나타났던 것이다. 사실 점으로 미래를 예지하고 행동하는 일은 인류역사와 함께 해왔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조정에 점복(占卜) 담당기구를 두고 국가대사에 대한 점을 쳤다. 민간에선 설날에 토정비결 신수점을 보아 그해 삶의 준거를 삼는 것이 세시풍습이었다. 불확실한 미래, 불안한 현실에 진정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점복은 긍정적 측면이 없지 않았다.

문제는 터무니없는 미신, 주술, 기복적인 점이 사람들의 생활 속에 녹아 있는 경우다. 많은 이들이 의지와 노력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보다 점복과 요행에 삶을 맡기고 시간과 재산을 쏟아 붓는 행위가 바람직할 리 없다.

점(占) 성행
1978. 2. 4 [동아일보] 7면

 점을 보고 미래를 판단하며 삶을 거는 일은 사회가 안정되지 못하고 삶이 불안할수록 심했다. 또 사람들이 일하고 노력한 만큼 거두지 못할 때에 훨씬 더 성했다. 물론 21세기 최첨단 과학시대라는 요즘도 점을 보고 그에 빠져 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점복이 중증의 사회 병리현상으로 지적될 만큼 심각했던 1960-80년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점괘를 맹신해 생긴 황당한 사건사고들

서리맞는 점쟁이 촌
1972. 8. 17 [매일경제] 7면

60년대엔 황당한 점 사건이 많았다. 62년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아들을 둔 어머니가 굿을 벌여 "처녀를 물에 빠트려야 아들 병이 낫는다."는 무당의 점괘를 듣고 자기 집 가정부를 강에 던져 숨지게 한 일이 생겼다. 어느 부부는 잃어버린 카메라를 찾겠다고 점을 쳤다 "동쪽에 사는 이웃 처녀가 범인"이라는 점괘를 받고 엉뚱한 사람에게 행패를 부리다 구속되기도 했다. 이혼한 부인에게 남편과 다시 연을 맺어주겠다며 패물을 등친 점쟁이, 유괴당한 어린이 집에 찾아가 "푸닥거리를 하면 아이를 찾을 수 있다."며 돈을 뜯어낸 무당이 경찰에 붙잡힌 일도 일어났다.

당시는 집에 환자가 있거나 불행한 일이 생기면 굿이나 푸닥거리를 하는 것이 일상처럼 돼있었다. 서울 중심가에도 무당집이 있었고 변두리나 시골로 가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났다. 굿을 하던 여자 무당이 신이 내려 걸걸한 남자 목소리와 표정으로 '귀신의 뜻'을 전하는 걸 본 아이들이 진저리를 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언론이 점복, 무속과 관련한 캠페인 기사를 반복적으로 실으며 타파를 주장했지만 열기는 전혀 식지 않았다. 66년 한 신문은 "학생 때 미신타파의 기치를 높이 들던 아가씨가 결혼해선 점 보러 다니는 여인이 된 경우는 흔하다"며 "높아가는 교육열 교육수준에 관계없이 유명 점술가 안방은 날로 번성하고 요행수는 그만큼 늘어간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상황은 더 심해졌다. 72년 한국도서잡지윤리위원회는 주간지와 월간지들에 "역학 점성 관상 수상 골상 등 복술가의 점괘를 싣지 말라"고 경고했다. "점괘 기사가 비과학적이며 독자에게 불안감을 주거나 국민들에게는 안이한 사고방식을 조성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당시 일간지들은 이 기사를 받아 전국에 약 2만 명의 점복술가가 있으며 서울에는 2,412명(남 861명, 여 1,551명)이 등록해 영업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65년 1,519명에서 5년 동안 무려 1천여 명이 증가한 수치. 계보별로는 무당이 1,074명으로 점쟁이 629명보다 압도적으로 많다고 보도했다.



점집촌이 생길 정도로 인기를 끈 70년대

당시 점복가들이 보는 점도 각양각색이었다. '원혼을 불러 한을 듣는 무당 굿'은 기본이고 '새가 점괘를 물어다 주는 새 점' '엽전을 흔들어 치는 신점' '그릇에 쌀 담아놓고 하는 쌀 점' '붓대 통을 흔들어 치는 붓 점' 등으로 궁합 택일 사주 작명 관운 입학 사업 출행 질병 등 온갖 인간사를 다 봐줬다. 그들 중에는 물론 주역 토정비결 등 전문서적을 공부하고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점괘를 내는 사람도 많았지만 다른 직업을 못 구해 점쟁이가 된 사이비도 적지 않았다. 점을 보러온 사람과 강제로 성관계를 맺고 이를 알리겠다며 돈을 뜯어내는 전과자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70년대 중반이 되면서 서울의 점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동선동의 이른바 '미아리 점집 촌'을 필두로 효자 청운동, 왕십리 등지에 집단 점집 촌이 들어섰다. 특히 정부가 자연보호운동을 벌이고 북한산 등 도시 근교 산중턱의 암자들을 집중단속하면서 산을 내려온 사이비 종교인이나 '도사' '거사'들이 산자락에 너도나도 점집을 차리고 영업을 시작했다. 한번 용하다는 소문만 나면 하루에도 수백 명씩 손님이 들어 기업 형 점집을 운영하는 관상가도 이때 등장했다.

"제 앞은 못봐도 남의 앞본다"는 맹인촌 성시
1978. 4. 6 [동아일보] 5면

78년 미아리 점쟁이 촌 취재에 나섰던 한 작가는 30년 경력의 맹인 점쟁이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우리는 이제 복술을 신비의 철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과학 그 자체거든요. 미신이라니, 천만에요. 나한테 틀린 점괘 받은 사람이 있으면 불러와 보세요." 작가는 취재 나온 것을 숨기고 처음 들른 점집에서는 맹인 점쟁이가 한참동안 아무 말도 않다 "댁은 점 보러 온 사람이 아니군요. 나는 지금 말하기 싫으니 당장 나가시요"라고 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점, 이제는 심심풀이로 격하되었지만..

"사주팔자 정해 놓고 낳자" 택일 출산
1986. 5. 10 [경향신문] 7면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점도 그야말로 분화하고 현대화했다. 한편에선 전통방식의 무당 굿, 신점을 하는가하면 다른 한편에선 컴퓨터 점, 사주 카페에 전화 철학관도 등장했다. 불가항력의 삶을 바꿔보려고 점에 매달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선 심심풀이 재미삼아 점을 보는 사람도 늘어났다. 아예 운을 만드는 경우도 생겼다. 86년 한 일간지는 임산부들이 생년월일시 사주팔자를 정해놓고 아이를 출산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보도했다.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는 산모의 절반이 점을 보고 출산일시를 정하며 병원도 점집과 연계해 그걸 들어준다는 얘기였다.

90년대 한 대학생 잡지가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48%가 점을 본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저학년 학생들은 심심풀이로 봤다는 학생이 많았으나 고학년 학생들은 취업 학업 등 현실이 답답해 봤다는 수가 더 많았다. 기업체들의 설문조사에서도 눈여겨볼 대목이 있었다. 승진에 관심이 많고 생활이 한창 힘든 40대의 경우 점집에 찾아가 점을 본 비율이 높았다. 다른 연령층에서는 "심심풀이로 점을 봤다"는 응답이 높았으나 40대는 "생활의 지혜를 얻으려고 봤다"는 응답이 더 높았다.

사회가 어지럽고 불안하며 전망이 불투명할 때면 점집이 성황을 이루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폭발사고 같은 대형사고가 빈발하거나 IMF 같은 경제위기에 직면했을 때도 점복 열기가 나라를 휩쓸었다. 언론은 그때마다 '단군 이래 최대 무속 열기' '점집, 돈방석에 앉다' 등 제목을 뽑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60-80년대처럼 황당한 사건을 전해준 적은 없었다. 선거에 일생을 건 정치인 등 일부 계층을 제외하곤 점도 이젠 심심풀이 파적으로 격하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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