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28, 2011

겨울한강의 얼음낚시 - 내가 바로 강태공!

겨울한강의 얼음낚시

치받쳐 오르더니 미끄러지듯 쑤욱 잠기는 찌. "걸렸다!" 낚아채는 손끝이 재빠르다. 솜바지에 군용파카, 어깨부터 머리까지 칭칭 휘감은 목도리, 두툼한 소가죽장갑. 그렇게 중무장한 몸에서 어떻게 저런 잽싼 동작이 나올까. 얼레 줄을 당겨 감으며 낚시꾼은 신이 났다. 조금 전 나직이 "걸렸다!" 혼잣말을 했지만 이젠 흥에 겨워 "걸렸다~ 걸렸다~" 노래하며 줄을 당긴다.

그래도 코끝은 강추위에 빨갛게 얼었다. 입에선 기차화통처럼 흰 김이 뿜어져 나온다. 금세 잉어 한마리가 얼음바닥 위로 올라왔다. 펄떡이는 놈을 보며 꾼은 "어, 그놈 크다! 두 자(尺)도 훨씬 넘네!" 라며 너스레를 떤다. 다른 꾼들도 일제히 "야아!" 환성을 지르며 발을 둥둥 구른다. 다른 낚시와는 다르다. 소리치고 발을 굴러야 강바닥 고기들이 움직이고 물린다는 것이다.



꽁꽁 언 한강 가운데 구멍을 뚫고 낚시?

강 한가운데다. 그것도 서울한강 한가운데, 인도교 부근이다. 배낚시가 아니다. 꽁꽁 언 강심에 끌로 구멍을 뚫고 그 속에 삼봉낚시를 내렸다. 꾼도 한둘이 아니다. 10여 명이 옹기종기 썰매 같은 나무판 위에 곰처럼 웅크려 전을 폈다. 다들 많게는 예닐곱 대씩 견지를 놓았다. 이따금 철교 위를 우르릉대며 달려가는 기차소리에 얼어붙은 강도 깜짝 놀라 쩡-쩡- 함께 운다.

신나는 은반의 향연
1961. 12. 15 [경향신문] 3면
워낙 추워 설까, 어부들은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찌만 노려본다. 칼바람이 회오리쳐 눈과 얼음 파편이 뺨을 때려도 미동조차 않는다. 강둑에서 보면 하얀 눈밭에 점점이 먹물을 친 한 폭의 동양화처럼 보이리라. 아, 그랬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겨울 한강은 도시인에게 이런 멋진 볼거리를 선사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유롭고 기분 좋은 그림을 그려줬다.

강추위로 한강이 결빙됐다지만 강심을 걸어보지도 못하는 요즘 생각하면 참 옛날이야기다. 50-60년대엔 꽁꽁 얼어붙은 강 위로 지프차가 다닌 적도 있었다. 왕십리 지나 뚝섬이나 그 위쪽 한강에 나가보면 트럭 자국도 나있곤 했다. 그러니 겨우 20여 군데 구멍을 뚫고 얼음낚시를 하는 것이야 일도 아니었다. 30~50cm 두껍게 언 강 위에서 쿵쾅거리고 달려도, 수백 명이 썰매를 타거나 스케이트를 지쳐도 얼음이 꺼질 일이 없었다.

서울한강의 결빙여부는 한강대교 노량진 쪽 2~4번째 교각의 상류 100m 지점에서 관측한다. 1906년 현대식 기상관측을 시작한 해부터 그랬다. 종로에 있던 관측소(현 기상청)에서 접근성이 좋아 그곳을 관측점으로 잡았다. 물살이 빠르고 수심도 깊어 웬만해선 얼음이 얼지 않는 곳이라 여기가 얼어 강물이 안 보이면 다른 곳도 모두 결빙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1906년 이후 한강이 하루도 얼지 않은 해는 모두 7번 있었다. 1960년에 처음으로 얼지 않았고 70년대엔 3번이나 강이 얼지 않았다. 이후 88년, 91년, 그리고 2006년에 단 하루도 한강은 얼지 않았다. 물론 기록과 실상은 다른 측면이 있다. 한강종합개발이 완료된 80년대 중반 이후 한강은 얼었다 해도 사람이 내려가 걸을 수 없는 살얼음 강이 됐다. 70년대 이전엔 말 그대로 꽝꽝 언데다 30-40일씩 연속으로 결빙상태를 유지해 각종 빙상 놀음이 가능했다. 겨우내 한강 결빙일수는 40년대 69일, 50년대 43일, 60년대 35일, 70년대 32일이었으나 90년대엔 8일로 급속히 떨어졌다.
53년래에 처음, 얼지 않는 한강
1960. 1. 13 [동아일보] 3면



추위 앞에도 여유롭기만, 내가 바로 강태공!

한강 얼음치기 반세기, 강태공 강순종 노인
1977. 1. 8 [경향신문] 5면
어쨌든 과거 겨울한강의 얼음낚시는 '한파 엄습'을 알리는 시적(詩的)도구였다. 언론은 추위가 왔다 하면 부리나케 한강에 달려가 강태공 사진을 담아왔다. 77년 1월, 경향신문은 광나루에서 진짜 강 씨 성을 가진 '강태공' 강순종 씨(61세)를 만난 사연을 기사화했다. 꽝꽝 얼어붙은 위에 눈까지 내려 백색 세상이 된 강심에 견지 대를 드린 그의 모습은 여유, 그 자체였다.

강 씨는 열다섯부터 46년간 한강에서 어부를 하며 살아왔다. 광나루에서 태어나 평생을 거기 살았고 봄여름 가을 겨울 없이 서울한강과 팔당 양평한강까지 고기를 찾아다녔다. 강이 얼지 않으면 마상이(노로 젓는 작은 배)를 타고 강을 오르내렸으며 겨울엔 동료들과 얼음 치기로 잉어 붕어를 건져 올렸다. "고기값? 한 근에 500원씩 장사꾼한테 넘겨주지. 예나 지금이나 잉어 값은 쌀값을 따라가, 잉어 한 근이 쌀 두 되 값이야."

한강에서 얼음낚시를 하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전문 어부다. 생업이 고기를 잡는 일이란 얘기다. 휴일에 종종 회사원 낚시 광들이 나름대로 무장을 하고 한강에 나오지만 목을 제대로 못 찾고 추위도 못 견뎌 이내 철수하곤 한다. 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이겠다고 버너에 고추장 야채까지 싸들고 오는 호사가도 있지만 손맛 한 번 못보고 얼음장 위를 걸어 나가기 마련이다. 전문어부들이 일하다보니 한강에도 바다처럼 파시가 생기기도 했단다.

"팔당 '밸미'에 '말등바위'란 게 있는데 잉어가 어떻게나 많이 잡히는지 말 등에 실어 날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일제 시절엔 아래 팔당, 위 팔당 열두 바탕(고기가 잘 잡히는 곳)에 하루 낚배 백여 척에 2,3백 명 낚시꾼이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잘 잡는 이는 20여 마리 60-70근씩을 거뜬히 건져 올렸으며 자연히 '잉어 경기' 따라 술파는 여인들이 몰려들었다는 것. 흑산도 위도 등 바다뿐 아니라 한강에도 파시가 섰다는 증언인 셈이다.
조는 낚시에 강심도 웃고 햇빛도 웃고
1969. 1. 13 [매일경제] 3면
 
"그런데 말이야, 요즘 뚝섬 아래쪽 한강에서 나는 고기는 찌개를 하든 고아먹든 석유에 담가놓은 것처럼 기름내에 절어있어. 고기 맛이 안 나." 그러니 낚배도 광나루 밑으로는 안 내려가고 얼음낚시 역시 그 곳 상류에서만 한다는 것이다. 노들강(노량진), 서강(서강), 동작강(동작동), 조강(김포), 용호(용산동)에 동호(금호 옥수동)까지 하류로 진출해 펼치던 낚시 판이 쫓기듯 동쪽으로 밀려났다는 얘기다.



한강이 얼지 않는 이유는? 개발과 오염이 원인

혹한에도 얼지않는 한강의 이변
1977. 2. 1 [동아일보] 7면
바로 그해 2월 동아일보는 '혹한에도 얼지 않는 한강의 이변'을 보도했다. "영하 10도 이하 강추위가 연거푸 며칠 계속되는 데도 한강은 예처럼 강심까지 꽁꽁 얼어붙는 일이 드물다"로 시작하는 기사는 그 원인을 공해에서 찾았다. 연세대 공해연구소장 권숙표 교수는 *수질 오염 *유속 유량의 변화 *하수의 가열효과 *한강상공 대기에 의한 온실효과 등이 복합 작용해 한강이 '부동강(不凍江)'이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당시 한강에는 매일 173만t의 하수가 흘러들었다. 그런데 한강의 하루 평균 유량이 5천만t이므로 결국 한강물 30t 중 1t은 도시하수라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 엄청난 하수는 오염의 주범이기도 하지만 수온을 덥히기도 해 한강이 쉽게 얼지 않을 뿐 아니라 얼었다가도 금방 녹아내린다는 설명이었다.
 
71, 72년 2년 연속은 물론 78년에도 한강이 얼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래도 67년까지는 한강의 이른바 특설링크에서 전국 65개교 어린이들이 참석한 초등학교 빙상대회와 4도시 빙상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후 한강에서의 공식대회는 자취를 감추었다. 바로 이때부터 낚시꾼들도 서서히 상류로, 상류로, 한남동을 거쳐 뚝섬 광나루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70년대에는 한강에서 썰매나 스케이트를 타던 아이들이 얼음이 깨져 익사하는 사고가 빈발했다. 주로 잠실 아래, 청계천 중랑천이 합류해 하수가 강에 유입되는 지점 하류에서 난 사고였다. 공해연구소 지적처럼 얼어봤자 두께가 얇고 또 어는 둥 마는 둥 녹아버려 일어난 사고였다. 이런 한강이니 전문 얼음낚시꾼들이 웬만해선 발을 들이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추억이 살아숨쉬는 곳, 그 시절 한강이 그립다

88서울올림픽에 맞춰 한강종합개발이 이뤄진 후 유량도 훨씬 늘고 유속도 빨라졌다. 오염을 방지하고 강의 청정도를 높였지만 물이 깊어지고 흐름이 빨라져 당연히 얼음도 얇게 얼었다. 기상대에서 "한강이 얼었다"고 발표해도 강심 얼음두께는 1-2cm에 불과한 적도 많았다. 94년 겨울 모처럼의 추위가 몰려와 한강이 얼었다는 소식에 낚시꾼과 썰매를 즐기려는 아이들이 몰렸으나 서울시는 청원경찰까지 동원해 이들의 진입을 막았다. 자칫 조금만 강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음이 깨지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까봐 취한 조치였다.

물론 개발이니 오염 온난화가 문제되기 이전에도 '이상난동'(춥지 않은 겨울)이 없었던 건 아니다. 64년 1월, 삼동에도 한강이 얼지 않고 남녘에선 꽃소식까지 있다며 신문은 호들갑을 떨었다. 한강변에 빨래 감을 들고 나온 여인들이 줄을 이뤄 쭈그려 앉아 소매를 걷어붙이고 빨래하는 모습을 항공 촬영해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2월13일 한강은 꽁꽁 얼어붙어 관측사상 가장 늦은 결빙일로 기록되기도 했다.
한강변의 기적 얼지않는 삼동
1964. 1. 15 [동아일보] 7면

한겨울에 얼음낚시를 하는가 하면 날이 풀려 수다도 풀리는 빨래터가 되기도 했던 한강. 얼음이 얼면 강변에서 조약돌을 던져 한없이 미끄러지게 하고 좋아 환호하던 추억의 놀이터. 언젠간 썰매로 강을 건너보겠다는 '거창한' 꿈도 갖게 했던 강. 지금의 각지고 번듯해진 강, 조금만 얼음이 얼면 안전상 부신다는 그 강보다 왜 그 시절 추억의 강이 더 그리워지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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