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는 이미 수백 척의 배로 가득 찼다. 그런데도 내항 좁은 수로를 따라 통통배가 연이어 들어온다. 고기를 엄청나게 잡아 설까, 배마다 중갑판이 미어터질 듯 뺑뺑하다. 오색 만선기(滿船旗)아래 검게 그을린 어부들은 신이 났다. 얼싸안고 춤을 춘다. 징과 꽹과리를 치며 목청껏 노래를 불러댄다. "칠산 바다에 뛰노는 조기/ 우리네 그물로 다 들어왔네." 뒤를 바짝 따르는 운반선 선원들이 후렴을 받아 화답한다. "지화자 좋다~ 어 헤요, 에 헤요!"
파시(波市), 바다에 선 어시장
흑산어장 초만원사례
1966. 5. 3 [동아일보] 1면
파시(波市)다. 풍요다. 모든 게 넘친다. 섬은 생선과 어부와 술, 그리고 아낙으로 가득 찼다. 뿐인가. 생선 쪼가리를 찾아 날아든 갈매기 떼마저 부두 하늘을 메웠다. 위판장과 주변엔 파리도 끓는다. 얼굴이건 생선에건 날것이 앉으면 귀찮아 손을 휘휘 젓지만 사람들 입가엔 웃음이 함박처럼 걸렸다. 조기가 벌써 몇 동(1동은 1천 마리)이 풀렸는가. 그 돈이 얼마인가. 한잔 걸친 기분은 왜 이다지 좋은가. 아아, 세상살이가 제발 오늘만 같았으면, 넘치고 흥청대 웃음꽃 가득한 파시가 오늘처럼만 열린다면….
파시는 바다에 선 어시장이다. 그물 가득가득 잡혀 올라오는 고기를 처분하러 뭍에 나갈 시간조차 아까운 배들이 어장에서 바로 운반선에 생물을 넘겼다. 그 바다가 파시다. 검푸른 파도에 목숨을 걸지만 만선만 되면 목숨 값을 두둑이 챙기는 사나이들. 한없이 거칠고, 뭍에의 그리움에 가슴이 단 사나이들이 평생을 품에 안고 사는 시장이 또 파시다. 그 바다 장터가 가까운 뭍과 섬의 항구로 옮겨지자 술과 여인이 숙명처럼, 철새처럼 따라붙었다. 그렇다. 파시 대박은 혼자 오지 않는다. 나눠가져야 진정한 파시다.
풍요의 대명사 '서해바다 파시'
1970년대 중반까지 서해바다 파시는 풍요의 대명사였다. 90년대 부동산 돈벼락 때 "개도 포니를 타고 다닌다."는 말이 유행했듯 60-70년대 서해 파시에선 "새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았다. 전남 흑산도 파시, 전북 위도 파시, 경기 연평도 파시는 조기어장의 3대 파시로 유명했다. 동 남해안의 삼치 멸치 고등어 오징어 파시도 있었지만 흥청거리고 북적대 한몫 두둑이 챙겨나가기는 조기 파시와 비길 바가 아니었다.
동지나해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는 봄에 황해를 거슬러 산란 길에 오른다. 3월 흑산도, 4월 칠산어장(전남 영광앞바다 위도근해), 5월 충남 격렬 비열도를 거쳐 연평도와 황해도 장산곶에 이르러 알을 낳는다. 그때의 바다는 목만 잘 잡으면 그야말로 '고기 반, 물 반'이다. 진정한 풍어, 진짜 대박은 그때 단 한 번 그물질로 만선이 되는 것이었다. 유자망(바다 속에 커튼처럼 내려 그물코에 물고기가 걸려들게 하는 그물)을 딱 한번 내렸다 올릴 뿐인데도 고기가 가득해 미처 떼지도 못하고 그물째 입항해야 진짜 만선풍어였다.
드높은 만선
1973. 4. 18 [경향신문] 5면
그래야 출어경비도 별로 안 들었고 첫물 조기라 값을 꽤 받았다. '해방 후 최대 풍어'라던 1966년 흑산 파시에는 첫 그물에 조기 80~120동을 잡은 배들이 오색 만선기를 펄럭이고 꽹과리를 치며 예리 항으로 들어오곤 했다. "황금에 덮인 흑산도"라는 신문제목이 나올 정도로 대풍을 맞은 그해 흑산 어장에는 전국에서 당도한 2천여 척의 어선이 바다에 잔뜩 깔렸다. 마치 옥쟁반에 콩을 뿌린 듯 드넓은 바다에 점점이 깔린 배들마다 그득그득 조기를 끌어올렸다. 흑산 어업조합은 그해 1월부터 4개월간 조기어획량이 4백58만kg, 1천5백28만 마리, 3억4천5백만 원어치라고 밝혔다.
만선의 기쁨이 가득한 어시장, 어둠이 깔리면..
서해의 초하 '바다의 집시 아가씨'
1962. 5. 28 [동아일보] 3면
이러니 밤의 흑산도는 그야말로 '니나노 세상'이었다. 선창가에 기다랗게 늘어선 목조 2층 건물마다 어부들이 들어차 동이 틀 때까지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골목길에선 팔도 사투리가 다 쏟아졌고 거친 사내들의 주먹질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쇠 젓가락으로 주전자 두드리는 소리에 간드러진 웃음이 잦아들고 대박을 맞은 뱃사람들은 '마도로스 인심'을 팍팍 썼다. 다음날 아침 헛돈을 뿌린 게 아까워 쓰린 속을 부여안고 해장술을 켰지만, "까짓 것 한 항차만 더 나가 한 번 더 대박을 터뜨리면" 금세 만회가 될 것이었다.
파시는 밀물 썰물처럼 옮겨 다녔다. 어떤 어장에서 고기 대박을 터트리느냐에 따라 파시는 이동했다. 선착장에 갈매기와 여인네가 얼마나 보이느냐로 파시의 규모를 알 수 있었다. 76년 흑산도 예리 항구의 상주인구는 3백12가구 1천7백여 명이었으나 5월 파시 때는 어부와 철새 아가씨 등 3천여 명이 늘어난 5천명이 복작거렸다. '명동보다' 더 붐비고 물가도 비싸다는 이곳 선창가에는 밤새 여는 다방 7군데, '관' '장'자 돌림으로 된 술집과 음식점 여관이 80개소, 이발소만도 네 군데나 됐다.
물가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74년 흑산 파시를 취재한 신문에 따르면 생선찌개 한 냄비는 무조건 1500원, 맥주 안주로 나오는 땅콩 한줌에 500원이었다. 개다리소반에 술 한상을 보면 못 잡아도 1만원은 나왔다. 술값만 비싼 게 아니었다. 80원이던 환타 한 병이 150원, 70원짜리 비누 한 갑은 130원이었다. 또 30원이던 하이타이가 60원, 30원이던 연탄 한 장이 90원이나 해 거의 모든 물가가 육지의 최소 2배, 많게는 4-5배까지 받았다. 오죽하면 억울함을 못 이겨 담벼락에 "손님은 곰이다"는 낙서를 대문짝만하게 써놓기까지 했겠는가.
아이러니한 것은 날씨가 좋아 어군을 제대로 쫓아야 풍어를 바라보지만 파시 장사꾼, 특히 여인네들은 오히려 날이 궂기를 기원했다는 점이다. 산꼭대기에 올라 고기잡이 선단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여인들은 "바람아, 강풍아 석 달 열흘만 불어라, 우리 님 보고 싶어…"를 소리 내 읊조리기도 했다. 기상상황이 안 좋으면 배는 조업을 중단하고 가까운 항구로 피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라도 님을 만나고 싶다는 염원이 거기 담겼다. 파시에서 맺어진 한두 푼 풋사랑일 망정 그리움을 잉태하는 건 여느 사랑과 같았다.
흑산도의 이모저모 '파시엔 낙조만이'
1974. 5. 9 [동아일보] 7면
70년대부터 내리막길을 걷게된 파시
「파시」가 사라져간다
1974. 5. 7 [동아일보] 7면
그러나 파시는 60년대 말을 절정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한일국교정상화와 어업협정 체결 이후 반짝했던 어획고는 장비 기술면에서 일본의 상대가 되지 않는 한국의 완패로 빠르게 귀착돼갔다. 게다가 69년에는 북한의 무장간첩선 침투 루트를 막는다며 서해 어로한계선을 남하한 탓에 조기잡이 어황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연평도 주어장과 서남방의 '밧세 어장', 백령도 남방 '서청골 어장'에서의 조업을 사실상 금지한 조치로 이때부터 조기 철 최고의 바다시장, 연평파시는 이름만 남긴 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위도 파시도 위기에 처했다. 70년 서해바다의 조류가 바뀌며 조기보다 삼치가 더 많이 잡히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칠산어장 최대의 항구 위도 파장금 항에선 그해부터 삼치파시가 서기 시작했다. 대일 활선어 수출선이 상시 정박해 칠산어장에서 잡힌 삼치를 바로 일본으로 빼냈다. 흥청거리던 조기파시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부두 위판장에 잠깐 스칠 뿐, 바로 일본으로 나가는 삼치 장은 파시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진짜 파시는 말이여, 파장금에서 멀리 칠산 어장까지 배를 건너뛰어 갈 수 있었당게! 어느 배에나 조기가 그득했어! 부안이나 영광에서 밤에 바다를 보면 휘황찬란한 불배들이 섬을 이룬거라, 그게 진짜 파시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시여, 다시 한번!
74-76년 흑산도에서는 거의 끝물 파시가 열렸다. 어획량이 급감하자 당국이 어로자금을 풀어 어선의 현대화 대형화를 유도했고 덩치가 커진 배들이 남지나해상까지 진출해 고기를 잡아온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79년 언론은 "파시는 옛말이 됐고 조기는 금값"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기 어획이 10년 전의 반의반 정도로 줄었다는 것이다. 가령 69년 인천항에는 참조기 6410톤이 입하됐으나 5년만인 74년 4924톤, 9년째인 78년 1675톤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줄었고 79년엔 겨우 640톤만 입하됐다고 했다. 그나마 참조기는 거의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들이 커지자 섬의 작은 항구에 파시가 서는 일이 없어졌다. 고기잡이 기술과 장비가 늘면서 알밴 조기를 그야말로 '일망타진'하니 연안의 고기가 사라졌다. 게다가 지구온난화 탓인지 수온과 조류조차 들쭉날쭉해 많던 고기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흥청거리고 질펀했던 파시가 섰던 자리는 이제 관광선이나 외지인을 위한 낚싯배 부두로 변했다. 새해 아침이면 한해 조기 고등어 삼치파시가 자주 열려 돈벼락이 떨어지기를 고대했던 섬사람들은 거의 뭍으로 떠났고 이젠 파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조기 흉어에 한숨만 만선
1977 5. 16 [동아일보] 7면
2011년 새아침, 그래도 '넘치고 흥청대 웃음꽃 가득한 파시'가 우리 삶 속에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파시여, 다시 한 번.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이 지닌 세계적인 인쇄 문화에 대해서 많이 보았습니다. 그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은 당연히 세계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체요절]입니다. 그런데 경이로운 기록이 또 하나 있지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다라니경, 국보 127호)이 그것입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 두 인쇄물의 차이점을 정확히 말해보면, “직지”는 금속활자 인쇄본 중 세계 최고이고 “다라니경”은 인간이 인쇄한 것 가운데 세계 최고입니다. 물론 남아있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제작 국가를 두고 현재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인쇄물
목판본인 다라니경이 발견된 것은 1966년 석가탑에서였습니다. 도굴꾼들이 석가탑 안에 있는 사리함을 훔치려고 탑을 해체하려다 미완에 그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를 기회로 탑을 해체했더니 2층 탑신부에서 사리함과 함께 다라니경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때는 참으로 허술했지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불국사 앞마당에 있는 탑을 도적질하려 했으니 말입니다. 어떻든 이렇게 발견된 이 책의 출간 연대를 추정해보니 751년 이전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 경이 중국에서 번역된 게 704년이고 불국사가 창건된 게 751년이니 이렇게 추정한 것입니다. 이 책 이전에 만들어진 것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인쇄본은 770년에 간행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것은 그 간행 연대가 751년 이전이니 일본 것을 20년 이상을 앞지른 것입니다.
이런 경을 석가탑 안에 넣은 것은 이 경이 갖고 있는 주술적인 힘 때문입니다. 이 경의 이름에 나오는 다라니는 ‘주문’을 뜻하는 것으로 이 주문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필사해 탑 같은 데에 봉안하면 무병장수하고 재앙이나 악업을 소멸시켜준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 경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요? 경전이라고 하니까 꽤 클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탑 안에 들어가는 것이니 커서는 안 됩니다. 이 경은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데 그 폭은 6.6cm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대신 길이는 6m나 됩니다. 당시는 제본하는 기술이 없어서 책을 이렇게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었답니다. 종이를 여러 장 붙여 만들었는데 종이 각 면에는 62줄이 있고 각 줄에는 평균 8자가 들어 있답니다. 이 정도면 대강 이 책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시겠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된 석가탑의 모습. 1966년 2층 탑신부에서 사리함과 함께 발견되었다.
다라니경에 얽힌 논란들
그런데 이 책은 안타깝게도 아직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직지”가 우리나라에 소장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면 다소 의외라 할 수 있습니다. 다라니경이 아직 유네스코에 등재되지 못한 것은 몇 가지 논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첫 번째는 중국과 얽힌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중국과 문화적으로 충돌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다라니경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중국은 이 다라니경이 자기들이 만들어 신라에 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앞서 인용한 직지는 고려의 승려인 백운이 썼다고 확실하게 적혀 있어 문제의 여지가 전혀 없었는데 이 다라니경에는 그런 것이 없어 논란거리가 된 것이지요. 일전에 TV 다큐멘터리를 보니 중국의 어떤 박물관에 이 다라니경의 모사품을 만들어 놓고 아예 자기들 것이라고 밝혀 놓았더군요. 물론 세계 최고의 인쇄물이라는 설명과 함께 말입니다. 사실 중국 입장에서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도 한국에 뺏겨 심사가 좋지 않을 텐데 세계 최고의 인쇄본마저 이 작은 나라에 뺏기기 싫었을 겁니다.
그러면 중국은 어떤 근거로 이 다라니경이 중국 것이라고 하는 걸까요?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경은 700년대 초에 중국에서 번역되고 인쇄되어 신라로 보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증거로 그들은 당나라 때 여황제였던측천무후가 만들어낸 한자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들마저 죽이고 황제가 될 정도로 독한 사람인데 황제가 된 후 자신의 위대성을 돋보이게 하고자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한자 가운데 4글자가 우리의 다라니경에 들어있습니다. 중국학자들에 의하면 이런 글자는 당 나라에서만 쓰였으니 당연히 이 다라니경은 중국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중국의 과학사를 정리한 것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석학 니덤(Joseph Needham) 교수도 중국의 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한국학자들의 주장
이런 중국의 주장에 대해 한국학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우선 측천무후가 만든 글자 문제인데 한국학자들은 이 글자가 신라에서도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글자는 다라니경보다 5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인데 그 정도 시간이면 신라에도 들어와 통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이 다라니경의 종이가 신라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제작 연대가 8세기 초라는 주장도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이 경을 쓴 ‘먹’이 신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신라 먹은 질이 아주 좋아 당시 중국에도 수출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주장을 모아 보면 당시 신라는 인쇄술이 발달할 수 있는 제반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한국학자들은 이때 중국에서 초기 형태의 목판인쇄술이 신라에 들어오자 다라니경 같은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이외에도 서체나 필법을 가지고 이 경의 신라 제작설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도 있는데 너무 전문적이라 여기서는 생략했으면 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검토해야 할 사건이 또 하나 있습니다. 다라니경과 같이 발견된 것인데 ‘석가탑 중수기’라는 문헌이 있습니다. 이것을 2005년에 와서야 박물관 창고에서 재발견하고 부랴부랴 복원해 내용을 확인했더니 뜻밖의 사실들이 밝혀집니다. 이 중수기에 의하면 고려 초인 1038년에 석가탑을 중수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이때 다라니경이 안치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는군요. 그 근거로는, 다라니경 같은 목판 인쇄는 고려 초인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에 성황을 이루었기 때문에 8세기에 이런 목판본이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이 중수기가 완전히 판독되어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전문가들은 대체로 이 다라니경이 석가탑을 처음 만들 때 안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고려 초인 11세기에 나온 다라니경에 비해 석가탑의 다라니경은 책의 구성이 유치하며 판각술도 훨씬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만일 석가탑을 중수할 때 다라니경을 넣었다면 이때의 수준을 유지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석가탑의 것이 연대가 앞설 수밖에 없다는 주장입니다.
인쇄문화 발달, 그리고 정보산업의 강국
어떻든 아직까지 이 다라니경은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인쇄물입니다. 그런 사실과 함께 중요한 것은 이 다라니경과 같은 뛰어난 인쇄문화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은 IT 강국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IT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조상들의 뛰어난 문화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과거의 IT 산업이 무엇입니까? 활자, 문자, 인쇄술 등입니다. 이 면에서 한국은 과거에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IT 강국이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일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공장생산을 거친 포장 담배가 생산된 것은 구한말인 1905년 8월이다. 이때 선보인 담배는 '이글'과 '매표' 담배로 각각 10개비들이 한갑에 3전 씩에 팔렸다. 그러나 이들 담배는 서울에 살던 일본인들이 만든 것으로 이에 앞서 일본인들은 일본에서 담배제조 기술자를 초청, 지금의 원효로 2가에 소규모 궐련제조공장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전에도 강화조약 직후인1879년 부산이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이 '히로'라는 궐련을 들여다 피우면서 우리나라의 지배층 및 부유층 인사들에게 팔기도했다.
격동기 삶의 애환 피워올린 하얀 연기담배처럼 널리 퍼지고, 인간을 속속들이 점령한 것은 신을 빼고는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가 골초가 되고, "오늘부터는 다시는 안 피우겠다"고 맹세하면서도 어느 샌가 초조하게 담배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반세기, 다른 어느 나라보다 격동의 세월을 보내온 만큼 우리의 담배에는 더 많은 애환이 서려있다. 즐거우면 즐거워서, 슬프면 슬퍼서 가까이하는 게 담배라 할 때 우리 민족에겐 그렇게 즐겁고 슬픈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담배이름 시대따라 변한다해방 이후 지금까지 나온 담배 중 최장수는 국군용인 화랑 담배로 49년 5월부터 현재까지 33년이나 애용되고 있다. 최단명은 62년 1월에 발매된 해바라기로 10개월 만에 사라졌다. 지금까지 발매된 담배는▲ 공작, 백구, 계명. 사슴, 백양, 파랑새, 백조, 비둘기, 나비, 타이거, 학 등 동물 이름 류 ▲백합, 무궁화, 진달래, 해바라기, 모란, 여삼연, 개나리, 상록수, 금잔디, 솔 등 식물류 ▲태양, 샛별, 샘, 은하수, 수정 등 자연계에서 따온 것 ▲한산도, 남대문, 신탄진, 파고다, 명승 등 명승 고적지와 지명을 딴 것 (중략)
부처, 보살, 사천왕과 신중들, 나한.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 부처의 세계를 그려낸다면 어떻게 표현해볼 수 있을까? 수평적인 모습일까, 아니면 수직적인 모습일까? 시대마다 국가마다 사람들이 생각했던불국토의 모습은 달랐을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한국보 86호 경천사 십층석탑은 약 13.5m의 웅장한 규모의 석탑으로, 석탑 전체에 불, 보살, 사천왕, 나한, 그리고 불교 설화적인 내용이 층층이 가득 조각되어 있다. 이는 모든 불교의 존상을 모은 일종의 불교적 판테온으로 고려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3차원적인 불국토의 세계를 보여준다.
경천사 십층석탑의 조성배경
경천사 석탑은 1348년(충목왕 4년) 건립된 석탑으로 원래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연리 부소산에 위치해 있었다. [고려사]기록에 따르면 경천사는 고려 왕실의 기일에 종종 추모제를 지냈던 곳으로 왕실의 왕래가 잦았던 사찰이다. 경천사가 폐사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20세기 초에는 이미 폐사되어 석탑만 남아 있었다. 비록 일부 글자가 파손되거나 마모되었지만, 석탑의 1층 탑신석 상방에는 건립 연대와 발원자, 그리고 조성배경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다. 명문에 따르면 석탑은 대화엄 경천사에서 1348년 3월 조성되었고, 발원자는 대시주 중대광 진녕부원군강융(姜融), 대시주 원사 고룡봉(高龍鳳), 대화주 성공(省空), 시주 법산인 육이(六怡)였다. 이들은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불법이 빛나고 석탑 건립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하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강융은 원래는 관노 출신으로충선왕의 측근이 되어 공을 세운 인물이며, 그의 딸은 원(元)의 승상 탈탈(脫脫)의 애첩이 되어 권세를 누렸다. 고룡봉은 고려 환관으로 원에 가서 황제의 신임을 얻어 출세한 인물이다. 그는충혜왕 대에 공녀로 간 기자오의 딸이자 기철(奇轍)의 여동생을 원의 황제인 순제에게 선보여 황후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자정원사(資政院使)로 봉해졌는데 자정원은 기황후의 부속관청이었기에, 그는 고려에서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처럼 석탑 발원자의 면모를 보면 친원 세력이 석탑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경천사 십층석탑, 고려 1348년, 대리석, 국보 86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재
발원자의 성격 때문인지 공교롭게도 경천사 석탑의 형태는 기존의 간결한 전통적인 석탑의 외형과는 매우 다르다.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소위 한자의 아(亞)자와 같은 형태로, 사면이 돌출되어 있다. (하단 사진 참조)
경천사 석탑 기단부의 모습. 기단부와 1층에서 3층까지는 몽골,
티베트계 불교에서 영향 받은 형태, 이후 4층에서 10층까지는 전통적 형태를 보여준다.
이러한 평면은 원대에 유행한 몽골, 티베트계 불교인 라마교 불탑의 기단부나 불상 대좌 형태와 유사한 외래적 요소이다. 반면 탑신부 4층부터 10층까지의 평면은 방형 평면으로, 경천사 석탑은 전통적인 요소와 외래적 요소의 조화 속에 탄생한 이형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경천사에 관한 몇몇 조선시대 문헌 기록에는 원의 승상 탈탈이 경천사를 원찰로 삼고 강융이 원에서 공장(工匠)을 뽑아 탑을 만들었다고 전하며, 당시에도 승상 탈탈과 강융의 초상화가 남아있었다고 기록했다. 비록 이를 모두 그대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발원자의 성향이나 석탑의 형태로 미루어 볼 때 원대 장인이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전체에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불보살이 백미
경천사 석탑에는 목조건축의 기둥과 공포, 난간과 현판이 잘 표현되어 있고, 특히 기와가 정교하게 표현된 옥개석은 마치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생생한 모습을 반영한 듯하다. 그러나 경천사 석탑의 백미는 역시 석탑 전체에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불보살의 모습이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기단부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들, 즉 밑에서부터 사자, 용, 연꽃, 소설 [서유기]의 장면, 그리고 나한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1층부터 4층까지의 탑신부에는 부처의 법회장면, 즉 불회(佛會) 장면이 총 16장면으로 새겨져 있고 그 사이사이 불교 존상들이 새겨져 있으며, 5층부터 10층까지는 선정인 또는 합장을 한 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이는 불교의 존상들을 불교적 위계에 따라 층층이 표현한 것이다.
경천사 석탑 탑신부의 모습. 상단부로 올라갈수록 불교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존상들이 새겨져 있다.
기단부에 새겨진 [서유기]는 송대에 이미 설화가 된 중국 당대 승려현장(玄奘)의 인도로의 구법행이 명대에 소설로 간행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기단부 부조 20장면을 살펴보면 이미 원대에 명대 [서유기]에 사용되었던 판화와 유사한 장면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유기] 장면은 이를 바라보는 불자들에게는 현장의 구법행을 통해 공덕과 깨달음에 대한 불교적인 교훈을 전하고, [서유기]의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내부에 안치된 사리를 수호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기단부에 새겨졌다고 추정된다. 탑신부의 조각은 1층부터 3층까지의 불회(佛會) 장면만을 일컬어 12회라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4층의 불회 장면을 포함하여 16회로 보기도 한다. 불회 장면 위에는 현판 모양에 각 불회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는데, 현판의 명칭과 도상을 정리해보면 아래의 표와 같다.
남
서
북
동
4층
원통회
(지장회)
(열반회)
(석가회)
3층
소재회
전단서상회
능엄회
약사회
2층
화엄회
원각회
법화회
다보불회
1층
삼세불회
영산회
용화회
미타회
경천사 석탑 기단부 중대중석 남동측 남면에 새겨져있는 ‘홍해아’ 장면.
서유기의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내부에 안치된 사리를 수호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탑의 하단 부분에 배치해 놓은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불회 부조의 조성 배경으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다. 우리 전통 불교와 관계 깊은 경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층별로 도상의 특징을 구분하여 1층은 우리나라 불교 신앙을, 2층은 사상을, 3층은 밀교 관련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사방불회로 추정하기도 하고 1층 남면의 삼세불회에 주목하여 새로운 개념의 삼불 도상이 출현한 것에서 도상적인 의의를 찾는 연구도 있다. 경천사 석탑의 정교한 조각 표현이 가능했던 이유는 경천사 석탑이 전통적인 불상이나 석탑의 재질인 화강암이 아니라 조형 작업이 쉬운 무른 재질의 대리석이기 때문이다. 경천사 석탑이 건립된 뒤 약 120여 년이 흐른 후, 조선 왕실 발원으로 만들어진원각사지 십층석탑에는 경천사 석탑의 형태와 도상이 그대로 재현되기도 하였다.
석탑 2층과 3층에 새겨져 있는 불회 장면의 모습. 2층 탑신석 남면 ‘화엄회’(왼쪽)과 3층 탑신석 남면 ‘소재회’(오른쪽)
경천사 십층석탑의 수난사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재개관 시에 재조립된 석탑의 모습. 약탈과 반환의 과정을 거치면서 100여년 만에 비로소 터전을 잡았다.
경천사 석탑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석탑 자체가 한국 문화재 수난사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1907년 순종의 가례에 일본 특사로 온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야키(田中光顯)가 석탑의 무단반출을 시도했다. 당시 주민들이 이를 저지했으나 헌병들이 총칼로 위협하여 수레로 부재들을 반출하였고, 다시 군수가 이를 제지 했지만 결국 한밤중에 밀반출되었다. 석탑 반출은 즉시 문제가 되어 <대한매일신보>에는 10여 차례 이상의 기사와 논설이 게재되어 석탑 반출의 불법성을 알렸다. 석탑 반환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의 발행인 미국인헐버트(Homer B. Hulbert)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의 발행인인 영국인베델(Ernest T. Bethell)의 지속적인 기고 덕분이었다. 특히 베델은 일본의 영자 신문과 <뉴욕 포스트(New York Post)>에도 불법 약탈을 알렸으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도 현지 신문에 석탑 밀반출을 폭로하였다. 결국 계속된 반환 여론 조성에 1918년 11월 15일 석탑은 국내로 돌아오게 되어 1919년 박물관에 귀속되었다.
국내에 반환된 경천사 석탑은 당시 기술로는 재건립이 어려웠기에
1960년까지 경복궁 회랑에 보관되었다. 1960년 국립박물관의 주도하에 경천사 십층석탑의 훼손된 부재가 수리되어 경복궁에 세워졌고, 1962년 국보 8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밀한 보존처리가 요구되었기에 1995년 석탑은 다시 해체되었고 문화재연구소에서 약 10여 년에 걸쳐 보존처리되었다. 이후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재개관 시 현재의 전시실에서 재조립되어, 100여 년 만에야 비로소 석탑의 그 웅장한 위용을 다시 드러낸 것이다.
경천사 석탑은 전통과 외래적 요소를 조화롭게 만들어 새로운 양식을 만든 우리 문화사의 기념비적 석탑이며, 동시에 굴곡진 우리의 근대사를 반추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